넌 누구냐?

분류없음 2008/08/30 21:14 posted by Rokea



에곤 실레의 그림은 독특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상당히 심오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에곤 실레의 그림 가운데에서 특히 자기관찰자 시리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그림에는  한 남자가 그려져 있고, 또 그의 등 뒤에도 똑같은 모습의 남성이 포개져 있다. 자신이라는 존재와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기라는 존재, 즉 자기의 이중성이 적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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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상을 보는 나와 나를 보는 나. 이 기묘한 어울림만큼 자기에 대해 잘 설명해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자기의 이중성, I와 me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은 누구나 글을 읽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글이라는 외부의 정보를 읽는 것도 자기이고,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자기라는 것을 아는 것 역시 자기라는 말이다.

이처럼 자기에는 외부를 아는 주체로서의 자기와 인식 대상으로서의 자기가 뒤섞여 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이중성이다.

자기의 이중성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에서는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던 주제였다.. 자기의 이중적 측면에 최초로 주목한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엇을 생각할 때에는 동시에 내 자신을 (중략) 다소라도 의식한다. 그런데 의식하는 것도 다름 아닌 내 자신이다. 따라서 나의 전체적인 자기는 이중을 이루어, 일부는 피지자이고 일부는 지자이며, 일부는 객체이고 또 일부는 주체이다”

 제임스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주아(主我, I), 주아가 인식하는 대상으로서의 자기를 객아(客我, me)라고 불렀는데, 그가 심리학적 연구 대상으로 중요시한 것은 객아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임스는 객아에는 물리적 자기, 사회적 자기, 정신적 자기의 3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물질적 자기란 자신의 신체, 가족, 소유물 등을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물건을 누군가가 칭찬해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무시당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소유물이 물리적 자기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사회적 자기란 주위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가진 인상, 이미지 등을 말한다. 아직도 철부지라고 부모가 보는 자기의 모습, 대담한 승부사라고 친구들이 보는 자기의 모습, 게으름뱅이라고 배우자가 보는 자기의 모습.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사회적 자기이다.

마지막으로 정신적 자기에는 자신의 내면적인 능력이나 성격, 특성 등이 포함된다.

제임스는 왜 정신적 자기를 me의 일부라고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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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의 이러한 분류는 탁월하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정신적 자기를 객아의 하나로 분류했냐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I”를 나의 정신적인 측면이라고 받아들인다. 스스로를 통합적으로 파악하는 자기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제임스는  이러한 정신적인 자기를 객아의 일부라고 이야기했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면 “I”란 도대체 우리의 어떤 부분을 가르키는 것일까?

참고로 윌리엄 제임스는 위대한 심리학자이기도 하지만, 신비주의 쪽에서는 칼 융과 함께 세상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에곤 실레의 그림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제임스의 설명에 따르면 앞에 있는 남자는 객아이고 뒤에 있는 남자는 주아가 된다. 그림에는 객아와 주아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나타난다. 제임스의 생각 역시, 비록 스스로가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객아와 주아는 별개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신적인 자기는 객아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부분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이런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아는 것이 별로 없기도 하고 또 삐끗하면 이상한 쪽으로 흘러버릴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쓴 “나를 위한 심리학”에서도 자기의 이중적 측면에서 간단히 이야기하고 바로 사회적 상황에서의 자기라는 부분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주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하지만 근래에 뇌과학에서 이루어진 몇몇의 발견은 주아라는 측면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과 같은 방식의 자기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기에 대한 퍼즐맞추기를 본격적으로 진행시켜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자기에 대한 퍼즐 맞추기가 완성될 수 있을지 여부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퍼즐 맞추기는 이미 시작되었고 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류 대학의 신경심리학자 데이비드 밀너는 한 여성 환자와 마주하게 된다. 다이앤이라는 이 환자는 샤워를 하다가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시각기능을 상실했다. 얼마지나 물체의 색깔과 질감은 인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물이나 얼굴의 형태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밀너 박사는 통상적인 시각검사를 해보았다, 검사결과 다이앤은 검안표의 가장 큰 글자조차 읽지 못했다.  손가락을 보여주고 몇 개냐고 물어보아도 전혀 대답하지를 못했다. 시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임이 분명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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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발견은 우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밀너박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것을 우연으로 보아야 하는가에서는 의문이 있기는 있지만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한다.

밀너 박사는  연필를 들어 다이앤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다이앤은 답을 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 하는 듯 했다. 그러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리 줘 보세요. 무엇인지 보게”라더니 박사가 쥐고 있던 연필을 능숙하게 채어갔던 것이다. 박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연필을 잡아채가는 동작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했다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능숙했기 때문이다. 다이앤은 단 한번의 연속된 동작으로 연필을 채어갔다. 연필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동작이었다.
밀너박사는 다이애너의 이러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보기로 작정했다.

우선 다이애너에게 직선을 그린 종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것은 수평입니까, 수직입니까, 아니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습니까?.” 바로 모른다는 대답이 되돌아 왔다.  그 다음에는 우편함의 수직으로 가늘게 뚤린 홈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뚫려진 방향을 물어보았다. 모르겠다는 대답이 되돌아왔음은 물론이다.

다음 단계로 밀너박사는 다이앤에게 편지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그 구멍에 넣어보라고 했다. 그녀는 도저히 못하겠다며 머뭇댔다. 보이지도 않는 구멍에 어떻게 편지를 집어넣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박사는 재촉했다. 편지를 부치는 셈치고 한번 해보라고.... 망설이던 다이애너는 주저주저하다 손을 뻗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손을 틀더니 정확하고 분명한 동작으로 홈에 편지를 집어넣었다. 그녀는 아무런 의식적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동작을 수행한 것 같았다. 홈의 방향과 위치를 모른다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동작이었다. 다이앤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토록 정확하게 편지를 집어넣을 수 있었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