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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일탈

by rokea posted Jan 1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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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이 완벽하게 보장된다면 사람들은 평소와는 달리 행동한다. 평소에는 주저하던 비상식적 행동에 나서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 결과 파괴적이 되기도 하고 공격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비상식적인 행동이 반드시 폭력적이거나 파괴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비상식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익명성은 남녀 간의 사랑을 급격하게 불태우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어둠이라는 익명성은 남녀 간의 관계를 급격하게 발전시켜 주기도 한다. 사회심리학자인 거겐( K. Gergen)의 어둠속의 일탈(Deviance in the Dark)라는 이름의  실험을 보면 남녀관계에서 어둠이라는 익명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저절로 알 수 있다.


실험은 간단했다. 서로 모르는 남녀 6명 혹은 8명을 한 방에 들어가게 해서 1시간 정도 머무르게 했다. 방의 크기는 3(3m x 3.6m) 정도로 8명 정도라면 여유 있게 앉을 수 있는 정도의 넓이였다.

 

피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의 사람들은 밝은 방에, 또 다른 한 그룹은 어두운 방에 들어가게 한 후 그들의 행동을 비교했다. 어두운 방의 경우는 적외선 카메라로 사람들의 모든 행동이 체크되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도 녹음되었다.

 

너무나 달랐던 밝을 때와 어두울 때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실험에 참가하기에 앞서 간단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나서 20분 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다.

 

당신은 이 방에서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 가량 머무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미리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 한 사람씩 안내를 받아서 그 방을 떠나게 됩니다, 그 방에 있던 사람들과 또 다시 마주칠 일은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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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결과를 보자. 우선 밝은 방에 들어간 사람들은 우선 다른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자리에 앉았다. 곁에 앉기보다는 서로 마주보는 식으로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 역시 일상적이고 사무적이었다. 또한 실험 시간인 1시간 중 90% 이상 대화가 계속되었으며, 신체적 접촉과 같은 친밀한 행동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어두운 방에 들어간 사람들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물론 처음 얼마 동안은 어두운 방의 사람들도 밝은 방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는 변화가 관찰되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대화가 사라지고 신체적 접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로 몸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자리를 바꿔 가까이 앉아 몸을 밀착시키는 커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밀착의 정도를 넘어 서로 몸을 만지는 커플이 관찰되었으며, 그 중에는 포옹하는 커플까지 있었다. 대화도 개인적인 내용이 주를 이뤄 이성간에 친밀도가 급격하게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두운 방에 참가한 50명의 100%는 서로 신체적 접촉이 있었다. 모든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 가운데 89%는 서로 의도적으로 신체적 접촉을 했다. 51%는 포옹을 했으며 78%가 성적 흥분을 느꼈다고 보고 했다. 실험 시작 전에는 생면부지의 남녀가 불과 1시간 만에 뜨거운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익명성은 사람들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 어둠 속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 상황에서 옆에 앉은 사람은 심리적으로 상당한 의지가 된다. 어둠 속에 있다는 공통점이 두 사람의 심리적인 유대를 강화시켜주는 것이다.

 

또한 어둠은 사람들의 심리적인 방어기제를 약화시킨다, 심리적인 방어가 무너지면서 곁에 있는 사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심리 상태가 된다. 모든 것을 가려주는 어둠의 속성상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익명성을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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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이 방을 떠나면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는 실험자의 설명은 또 다른 익명성을 보장해주었고 그것이 이들을 한층 더 대담하게 만들었다. 실험참가자들은 일종의 몰아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실험에 참가했던 한 피험자는 다음과 말했다.

 

우리들은 서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몸을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우정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한 사람씩 방을 떠날 때는 상실감을 느껴 섭섭했다. 나는 그 경험이 재미있고 좋았다는 느낌을 갖고 그 방을 떠났다.”

 

결국 어둠으로 보장된 익명성은 그렇지 않았다면 표현되지 않았을 애정이라는 감정을 한층 더 드러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실험의 결과는 너무나 충격적이라 한동안 매스컴의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이 실험과 같은 결과는 더 이상 재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2012년 디스커버리채널에서 73년도의 실험과 동일한 실험을 실시했던 적이 있었다. 실험을 주재한 사람은 1973년의 실험을 주재했던 거겐이었고 실험의 절차도 거의 동일했다. 하지만 실험의 결과는 1973년의 실험과 완전히 달랐다. 실험 참가자들 간의 접촉행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은 채로 1시간의 실험이 끝났던 것이다.


1973년의 실험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일어났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서구인의 성의식이 변했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들 수 있다.

 

세상은 늘 진보해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성과 관련해서 우리들이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과거 세대보다는 지금 세대의 성문화가 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서구의 경우 지금의 성의식은 과거 세대보다 퇴보한 면이 분명히 있다.

 

1970년대는 성혁명의 최절정기라고 일컬어질 만큼 성의 개방화가 급속히 진전된 시대였다. 프리섹스를 권장하는 사회분위기마저 있었다 80년대 이후 성문화에는 두 번의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에이즈의 유행과 반(反)섹슈얼 하라스먼트 의식의 대두가 바로 그것들인데 이 두 가지가 성의식의 보수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성의식화의 보수화가 접촉행동에 나서는 것을 가로막았고 이것이 73년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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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험의 결과가  더 이상 재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어둠이 남녀 간의 관계를 발전시켜 주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남녀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는 어둠만 한 것이 없다. 서로 상대에 대한 호감은 있지만 아직까지는 서먹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커플이라면 어둠을 적극 활용해보라.


어둠을 활용하라는 말은 인적 없는 캄캄한 곳을 골라 데이트를 하라는 게 절대 아니다.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서 으슥한 곳만 찾아다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어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으슥한 곳보다는 조명이 좀 어두운 카페라든지 천체 박물관 같은 곳이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