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처럼 자존심 덩어리인 사람들보고 돈을 벌라고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누구나 알듯이 돈을 벌려면 자존심을 굽혀야 한다. 뻣뻣하게 굴어서는 절대 돈을 벌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자존심 덩어리인 사무라이들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굽혀가면서 장사를 잘 할 수 있을까?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켜 일단 천황을 권력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표면적으로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토지와 인민도 천황의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정은 전혀 달랐다.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은 그대로 있었고 사무라이들도 다이묘로부터 녹을 받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막부가 무너지고 천황이 실권을 장악한 듯 했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에도(江戶)시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는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다이묘가 물러나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스스로의 수족을 잘라 버렸다
다이묘뿐이 아니었다. 천황의 권력을 받쳐줄 중앙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혁명에 성공한 사무라이에게도 기득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해야만 했다. 메이지유신은 사족(士族)이 일으켰고 전비와 기타 비용을 부담한 것은 다이묘였다. 혁명에 성공한 대가가 혁명을 도운 다이묘의 영토를 빼앗고 또 혁명의 실천자인 사무라이들을 실업자로 전락시키자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간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족, 즉 사무라이들 스스로가 자기 팔다리를 끊는 외과수술을 단행해 버렸다. 스스로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이다. 이것이 폐번치현(廢藩置縣)이다. 종래의 번을 폐지하고 근대적인 지방체제인 현을 설치한 것이다.
2백70명의 다이묘가 하룻밤 사이에 날라갔다. 또한 1백90만명의 사족이 하룻밤 사이에 평민으로 전락해버렸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3천만 정도였으니 인구의 6.3%가 신분을 잃고 실업자 신세가 된 것이다. 일본 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사건이라 불릴 만했다.
혁명은 누가 한 것인데, 이게 무슨 꼴이냐는 사무라이들의 볼멘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삐끗하다가는 외국에 나라를 빼앗겨 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어 큰 충돌 없이 넘어갔다. 물론 이때 잉태된 불만은 훗날 서남(西南)전쟁으로 폭발한다.
문제는 사족였다. 하룻밤 사이에 실업자로 전락해버린 사무라이들이 문제였다. 물론 사족들에게 여분의 돈은 주어졌다. 수 년분의 연봉을 일시불로 받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명예퇴직금이다.
아사를 감행한 사무라이도 있었다
쯔지야 히사아키(土屋久明)라는 사무라이는 스스로 아사(餓死)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는 늘 “영주님이 주신 돈이 남아있을 동안만 산다”고 주위에 말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자 그냥 굶어 죽어 버렸다. 지금 관점으로 본다면 참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지만 사실 이 아사야말로 당시의 사무라이의 멘탈리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모두가 쯔지야와 같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자존심이 강한 사족이라고 해도 먹고는 살아야 했다. 가족도 있으니 무슨 직업인가를 찾아야 했다. 호구를 이어가려면 이것저것을 따질 겨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무라이의 전업은 녹록치 않았다. 하다하다 어쩔 수 없이 장사로 나선 사무라이도 많았다. 이들의 장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당시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의 비유로 “무사(武士)의 상법(商法)”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이다. 장사에 나선 사무라이들은 망하거나 사기를 당해 거의 모두가 심각한 곤란에 처했다고 한다. 옛날 좋았던 시절의 향수에 사로 잡혀 뻣뻣하게 구니 장사가 잘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무사의 상법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요즈음은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가리키기 보다는 소비자에 대한 배려 없이 횡포를 부리는 장사꾼들을 가르킨다. 소비자에 바가지를 씌우는 양아치 장사꾼을 가리킬 때 쓰인다. 비슷한 의미로 사무라이 상법은 위협, 공갈로 물건을 파는 행위를 의미하고 있다.
몰락한 사족의 자제들은 스스로를 구하는 수단으로 학교를 선택했다. 돈이 있을리 없으니 학비가 필요 없는 관립학교나 군인학교로 사족의 자제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들이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