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부르는 외교적 착시
“트럼프가 필리조선소 이야기를 꺼낸 건 국내용이다. 우리보고 거기서만 만들라는 뜻은 아닐 거다.”
— 대통령실 관계자 발언(2025.11)
이 짧은 말 한마디에, 지금 한국이 왜 협상에서 끌려 다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패턴의 문제입니다.
- 근거 없는 낙관주의 — ‘설마’의 정치
한국 협상팀의 가장 큰 문제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irrational optimism)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국내용일 거야.” 이 익숙한 말들은 협상장의 위험 신호를 무력화시키는 주문이 됩니다. 낙관주의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을 무시한 자기 암시가 되면, 협상은 이미 상대의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됩니다. AI든 무역이든, 오늘날 협상은 냉정한 이해관계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관계’의 세계, 즉 상대가 우리를 고려해줄 것이라는 믿음 속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 확증 편향 — ‘우리는 잘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
이런 낙관주의의 배경에는 확증 편향(confirmatory bias)이 작동합니다. “이번 협상은 잘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 반복되면, 그 자체가 사실처럼 느껴지는 심리적 효과가 생깁니다. 정책 결정자들은 불리한 정보보다 유리한 신호만 받아들이고,불확실한 발언은 “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려 합니다. 이건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의 문제, 즉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의 습성입니다.
그 결과, “필리조선소 발언은 국내 정치용”이라는 식의 해석은 현실 검증보다 자기 위안의 도구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건 협상이라기보다 자기 최면(self-hypnosis)에 가깝습니다.
- 집단사고 — ‘다 그렇게 생각한다’의 함정
정책 결정이 집단 내에서 이루어질 때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위험이 커집니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면 “괜히 분위기 깨지 말라”는 압력이 생기죠. 결국 내부는 한 목소리로 “괜찮다”, “좋은 방향이다”만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소한 의심이나 경고 신호는 모두 걸러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낙관이 조직 전체의 세계관이 되어버립니다. 협상 상대는 그 틈을 정확히 읽고, “양보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얻습니다.
- 현실 인식의 결핍이 초래할 결과
지금의 태도는 단기적으로는 ‘체면 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협상력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상대는 이미 “한국은 자기 위안형 협상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그 뒤로는 한마디의 압박만으로도 쉽게 양보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협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상대의 의도를 오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맺음말
협상은 심리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협상은 이미 심리적 패배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국내용 발언일 뿐’이라는 말은 외교적 분석이 아니라, 현실을 버티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언어입니다. 진짜 외교는 희망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 냉정함이 없을 때, 협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