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노예계약’의 민낯

수치심은 공동체의 건강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그것을 잃어버린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의 수치심」은 그 기록입니다.

한수원과 한전은 지난 1월 체코 원전 수주를 위해 웨스팅하우스와 원전 수출시 원전 1기당 6억5천만 달러(약 9천억원)의 물품 및 용역 구매 계약을 제공하고 1억7천5백만 달러(약 2천4백억원)의 기술 사용료를 납부하는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기술 주권을 빼앗긴 노예계약’이라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국수력원자원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계약은 흔히 “노예계약”이라 불립니다. 국내 기술과 자원을 활용해도 반드시 웨스팅하우스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계약 조건은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습니다. 공기업이 국민의 세금과 전기요금을 바탕으로 움직이면서, 왜 이렇게 불평등한 조항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위에서 하라니까 했겠지만요.

더 큰 문제는 그 안에 공직자로서의 자존심과 책임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계약이 불리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데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서명했습니다. “국익을 지킨다”는 대의보다 당장의 편의, 혹은 개인적 이익이 우선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공동체의 신뢰를 배반하지 않도록 우리를 제어하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번 한수원-웨스팅하우스 계약은 마치 식민지 시절 불평등 조약을 자진해서 받아들이는 듯한 꼴을 보였습니다. 공직자가 자기 자리에서 국민을 대신해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굴욕을 자초한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공직자가 서명한 계약은 곧 국민 전체의 굴욕으로 이어집니다. 제도의 문제 이전에, 최소한의 수치심이 있었다면 이런 불평등한 계약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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