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손바닥 안에서 무한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검색창 하나만 열면 정치와 과학, 종교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식과 주장이 쏟아집니다. 언뜻 보기에 이런 시대는 인간을 더욱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만들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식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광신(狂信)이 더 쉽게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광신은 왜 강력해지는가
광신은 단순히 특정 종교나 사상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정치적 지지, 음모론, 건강법, 심지어는 소비 습관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광신적 태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이유는 뚜렷합니다.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복잡해졌고, 그 복잡성을 견디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을 단순하게 설명해 주는 구호와 확신 속에 머무르고 싶어합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인지적 폐쇄성(need for cognitive closure)이라고 부릅니다. 즉, 불확실하고 애매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단순하고 명확한 해답을 갈망하는 성향입니다. 광신은 이 욕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우리가 옳고 저들은 틀리다”라는 구호만큼 명확한 해답은 없으니까요.
집단 속에서 극단으로
광신은 개인의 수준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집단 속에서 공유될 때 그 위력은 배가됩니다.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토론할수록 의견은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우친다는 연구 결과는 수없이 많습니다.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대화를 나누면, 그들의 주장은 점점 더 과격해지고, 반대편에 대한 혐오는 더 깊어집니다. 마치 증폭기처럼 집단이 개인의 신념을 밀어붙이는 것이지요. 그 결과 광신은 한 개인의 편향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집어삼키는 힘으로 확장됩니다.
광신이 주는 안전감과 위험
광신은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안전감을 줍니다. 현실은 복잡하고 불확실하지만, 신념 공동체 안에서는 세계가 단순합니다. 의심할 필요도, 복잡한 설명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사람들은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내면화하게 됩니다.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은 ‘틀린 사람’이 아니라 ‘악한 자’, ‘위협적 존재’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신뢰는 무너지고, 협력의 기반은 허물어집니다.
광신을 넘어서는 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광신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의심과 성찰의 습관입니다. 확신을 주는 구호와 주장 속에서도 한 번쯤 “정말 그럴까?”라고 스스로 묻는 것,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왜 그렇게 생각할까?”라고 물어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광신은 단순함의 매력에 기대어 살아가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힘은 복잡함을 견디는 용기에서 나옵니다. 세상을 쉽게 나누지 않고, 불편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나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광신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맺으며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신념조차 객관화하고, 필요하다면 수정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광신이 지배하는 시대를 넘어,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