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마지막 미지의 경계선입니다. Psychology Today의 Above All, Listen: Studying the Experience of Death라는 기사는 이 경계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귀를 기울일 것인가를 묻는다. 단순히 죽음의 과정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이 경험하는 세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요청이다. 그 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임종 장면이다.
“이 아름다운 선율이 들리나요?” — 누구의 세계가 진짜인가
베벌리힐스 자택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라흐마니노프는 눈을 뜨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아름다운 선율이 들리나요? 이 엄청나게 아름다운 음악이요?” 가족과 친구들은 거의 동시에 답한다. “아니요, 음악은 없어요.” 그럼에도 그는 다시 말한다. “정말 아무것도 안 들리나요? 너무… 아름다운 멜로디인데…”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계속해서 “아무것도 없다”고 못 박는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말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음악은 제 머릿속에만 있는 거군요.” 그리고 그는 죽는다. 이 짧은 대화는 단순한 환각의 기록이 아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서로의 세계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드러내는 한 편의 심리학적 에피소드다.
- 죽음은 ‘내부 세계’가 압도하는 순간이다
임종 직전의 환청이나 환시는 의학적으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에게 들린 이 음악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평생 음악과 함께 산 사람이 마지막으로 경험한 자기 완결적 세계였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순간, 외부 현실보다 내부 현실이 크게 확장된다. 그는 평생 만든 모든 음악이 농축된 듯한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있었다. 그가 듣던 세계는 그의 삶 전체가 응축된 마지막 심리적 공간이었다.
- 우리는 타인의 마지막 세계를 너무 쉽게 부정한다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반응은 사실 자연스럽다. 그들은 자신이 듣지 못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장면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왜 남이 경험하는 세계를 그렇게 빠르게 부정하는가? 죽어가는 사람이 말한 ‘경험’을 왜 진지하게 들어주지 못하는가?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타인의 내부 세계를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Psychology Today는 말한다.
“즉각적인 판단이나 해석 없이, 죽어가는 사람이 보고한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하라.”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세계를 존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체계적인 호기심” —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
글은 호기심(curiosity) 이라는 독특한 태도를 강조한다. 죽음을 관찰 대상으로 삼으라는 뜻이 아니다.
어가는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라는 뜻이다. 왜 그런 경험을 하는지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 경험의 고유함을 받아들이려는 태도. 그것이 ‘체계적인 호기심’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람들이 보는 환상, 빛, 음악, 또는 무엇이든 그것은 뇌의 오류가 아니라 그들이 마지막으로 건너가는 길목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고유한 세계다.
- 우리는 모두 그 길을 걸어갈 사람들이다
Psychology Today 글은 이렇게 말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향하게 될 개척지에 대한 존중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닿아 있는 미래 경험이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마지막 경험은 다가오는 어떤 진실의 조각일지 모른다. 라흐마니노프가 들은 ‘아름다운 선율’도 삶의 마지막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이었을 것이다.
- 이 에피소드가 말해주는 것
요약하자면, 라흐마니노프의 임종 장면은 다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 사람의 마지막 세계는 외부 현실보다 더 진짜일 수 있다.
- 그 세계를 쉽게 부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들어라.
- 죽음 앞에서는 판단보다 ‘경청’이 더 중요하다.
- 죽음의 경험을 존중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라흐마니노프가 들었던 음악이 실제로 존재했는가? 아마 우리에게는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 존재했다.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하다.
맺음말
라흐마니노프의 마지막 음악은 죽는 자에게만 들리는 선율이었다. 우리는 그 음악을 들을 수 없지만,
그가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마지막 세계는 온전히 진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누군가가 보여주는 세계는 그 사람의 인생이 마지막으로 빚어낸 현실이다. 그것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