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불행이 때로는 위로가 될까?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의 불행에서 오는 기쁨을 의미하는 감정으로, 종종 사회적 비교와 공정성 갈망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 감정은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강해져서 의존하게 될 경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감정의 출처를 이해하고 조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 결국 감옥갔대.”
이 말을 들으며 우리는 가끔, 아주 가끔, 안도감과 묘한 기쁨을 느낍니다.
도덕적으로 떳떳하진 않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나요?

이 감정에는 이름이 있습니다.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독일어로 불행(Schaden)과 기쁨(Freude)의 합성어입니다.
말 그대로, 타인의 불행에서 오는 기쁨을 뜻하지요.

이 감정은 분명 몰래 즐기는 감정입니다. 표정으로 드러내긴 부끄럽고, 입 밖에 내면 좀스러워 보일까봐 숨겨야 하는 감정.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이 샤덴프로이데가 생각보다 흔하고, 복잡하며, 때론 치유적인 기능까지 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1. 우리는 왜 남의 실패에 기쁨을 느끼는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사회적 비교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실패하거나 망가지는 것을 보면, 상대적으로 내가 덜 초라해 보이기 때문이죠. 평소에 잘나가 보였던 사람일수록, 그 몰락은 우리에게 더 큰 만족감을 줍니다.
또 하나는 공정성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 쉽게 성공했어.”
“운으로 떴잖아.”
이런 생각을 품고 있던 사람이 실패했을 때, 우리는 마치 세상이 균형을 되찾은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불공정이 시정되었다는 카타르시스, 거기엔 위로가 깃들어 있습니다.

2. 샤덴프로이데는 나쁘기만한 감정일까?
최근 연구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합니다.
한 실험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이 타인의 실패 소식을 접했을 때, 생리적 긴장이 완화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느끼는 참가자들일수록, 성공한 사람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며 심리적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샤덴프로이데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정서적 자구책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 감정이 공공연한 조롱이나 악플로 표출될 경우, 그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벌어지는 작은 위안,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라는 심리적 휴식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경험하고 있습니다

3. 감정의 농도가 문제다
샤덴프로이데가 문제되는 건, 그 감정이 강해져서 남의 불행 없이는 내가 위로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입니다. 이런 정서는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번지기 쉽습니다.

특정 유명인이나 정치인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희롱하기
타인의 실패를 증오 섞인 ‘정의 구현’으로 합리화하기
성공한 사람의 몰락에 과도하게 환호하며 “이제야 살 것 같다”고 말하기

이쯤 되면, 공정성 회복이 아니라 복수심의 해소가 됩니다.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한 채, 타인의 실패를 통해서만 감정 조절을 하려 한다면 그건 사회적 정서가 아니라 정서적 의존에 가까워지지요.

4. 샤덴프로이데를 넘어서기
샤덴프로이데는 인간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내가 저 실패에 안도감을 느꼈을까?”
→ 그 질문은 나를 들여다보는 시작점이 됩니다.
감정에 이름 붙이기: 수치심, 열등감, 억울함… 감정을 인식하면 조절이 쉬워집니다.
비교에서 성장으로: 타인의 실패를 기다릴 게 아니라, 나의 오늘을 어제보다 나아지게 하려는 마음으로.

누구나 샤덴프로이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우리는 조롱의 소비자가 될 수도,
혹은 자기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남의 불행에서 내 감정의 단서를 찾는 건 때때로 유익합니다.
그러나 결국 나를 진짜 치유하는 건, 내 감정의 정직한 직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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